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울 요제프 괴벨스/생애 (문단 편집) === 라인란트 나치즘의 선구자 === 1924년 [[뮌헨]]에서 벌어진 나치당의 [[맥주홀 폭동]]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괴벨스는 나치당과 히틀러에 대한 호감이 높아졌다. 전국구 전설급 재판에서의 웅변으로 '''[[메시아]]급''' 가능성을 보여준 히틀러 때문이었다.[* 당시 히틀러의 '[[나의 투쟁]]' 드립과 달리 옥중투쟁은 훼이크였다. 히틀러는 란츠베르크 요새에서 초호화 수감 생활을(...) 하던 중이라서 아직 만날 수 없었다. 괴벨스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히틀러와의 만남은 기다린 만큼 극적이었다. 후술함.] 결국 고교 동창이자 친구이며 후원자의 아들인 프리츠 프랑이 폭동으로 불법화된 나치당에서 일을 하던 인연으로 나치당에 빠져들었다. 괴벨스는 초기엔 라인란트 지방에서 나치당 좌파의 우두머리 격이며 히틀러가 감방에 간 후 당의 행정일을 도맡던 그레고어 슈트라서 쪽으로 선이 닿는다. 당시 나치당 히틀러가 폭동을 계기로 얻은 유명세를 발판삼아 본거지인 뮌헨에서 북독일로 확장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당 내 행정가이던 그레고어 슈트라서는 이러한 배경으로 북독일의 도시 노동자 계층을 공략 중이었다. 괴벨스는 고향인 라인란트 지방 엘베펠트 관구에서 정당 일을 시작했고, 그 당시 많은 정당이 그러했듯 길거리 정치 연설 또는 선동은 시내 한복판에 연단을 차려놓고 올라가서 했다. 친구이자 나치당으로 괴벨스를 끌어들인 프리츠 프랑은 당시 괴벨스의 천부적인 첫 연설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 첫 연설 무대에서 그는 쭈뼛쭈뼛 망설이며 올라섰다. 군중들도 많지 않았고 쳐다보는 사람 수는 더 적었다. (하지만) 막상 연설을 시작하자 지나가던 공산주의자 하나가 '닥쳐라, 이 자본가 놈아'라고 소리치며 방해했다. 그러자 괴벨스는 웃으며 그 사람을 크게 부르더니 지갑을 꺼내 "'''자~ 이리 와서 누가 더 돈이 많나 세봅시다'''" 하면서 자신의 낡은 지갑을 털어 쨍그랑 동전 몇 개가 전부인 걸 청중들에게 확인시켜주며 군중들을 휘어잡았다. 이외에도 북부 라인란트 지방 엘베펠트 관구[* Gau. 나치당 행정 조직으로 괴벨스는 후에 [[베를린]] 대관구장(Gauleiter)이 된다.]에서 본래 본업이던 언론계에 종사하여 글도 쓰기 시작한다. 나치당 초기 상황상 별다른 사상도 없이 승전국보다 더 미운 유대마르크스주의 하수인 놈들과 전쟁 틈에 돈을 번 벼락부자, [[캐비아]]와 [[샴페인]]을 처드시는 높으신 나으리들, 그리고 혐오스런 유대인 공화국 체제를 공격하는 데만 급급한 괴벨스의 글은 다른 많고 많은 불평분자들의 것과 그리 차별성은 없는 내용이었지만, 타고난 '''독일어를 구사하는 능력'''과 박사라는 학력 때문에 좋게나 나쁘게나 튀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시대가 평온했다면 이러한 재능을 '진짜' 신문이나 잡지에서 시를 쓰거나 문학평론을 하면서 썼겠지만... 어쨌든 곧 지역 당 기관지의 거의 모든 글은 괴벨스에게서 나오게 되었으며 머지않아 그는 또한 편집장이 되었다. 보수는 듣보잡 군소정당 기관지답게 형편없었지만 뜻밖의 자아실현으로 괴벨스는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봉급이 너무 적어서 부모를 비롯한 지인들에게 여기저기 돈을 꾸러 다니는 신세였고, 명성이 높아지며 나치 중앙당 대회에 초청받았지만 나치당의 당대회에 갈 땐 기차표를 살 돈이 없어서 갈까말까 고민할 정도로 어려운 형편이었다고 한다. 막상 [[나치당]]의 소굴인 뮌헨은 폭동 실패로 일망타진된 데다가 당이 불법화까지 되었고, 남아있는 인물들도 구심점도 없고 괴벨스가 구역질 나게 싫어하는 [[부르주아]]나 높으신 분들이 아니면 듣보잡이라 체포를 면한 돌격대 떨거지들 뿐이었다.[* 나치당서 최고 네임드급인 독일의 '영웅' [[루덴도르프]] 장군은 만났지만 괴벨스는 그를 구시대 인물로 생각해 별 감명은 받지 못한 듯하다.] 뮌헨의 나치중앙당에서 괴벨스를 수행하던 사람은 초기 당원들과 대면하는 괴벨스를 가리켜 ''''라인란트 나치즘의 선구자''''라고 소개했다.[* 이 소개는 괴벨스의 이론가적 면모를 높이 산 소개인데, 실제로는 관구 내에서도 극심한 이념 갈등을 겪었고 괴벨스의 북독일과 나치당 주류의 남독일 뮌헨의 성향도 달랐다. 이 소개는 역설적으로 나치당의 사상적 콘텐츠가 매우 빈약하다는 걸 보여준다. 나치당에서도 이것을 당당하게 인정하며 '히틀러가 곧 콘텐츠다'라며 인물 우위를 주장한다. 사상적 논쟁은 유대인들의 음모라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